소설가와 극작가를 위한 법률

내가 쓴 소설과 극본, ‘표절’당했다고 인정받을 수 있을까 1

김지환 변호사 2024. 9. 5.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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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법원에서 표절을 인정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도 2년 전부터 틈날 때마다 습작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 기관에 수강신청도 해서 8개월 정도 합평 수업도 참가했습니다. 수업 중 염려가 되었던 것은 저 나름대로 머리를 짜서 쓴 습작을 합평에서 발표하면 누군가가 표절하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제 습작이 변변치 않기 때문에 이는 기우에 불과하겠지만.
   공모전에 출품하기 위해 신인 작가들이 들여야 하는 공이 얼마나 클지 이해합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합평에서 습작을 위해 집중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공모전을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은 정말 형용할 수 없겠지요. 그리고 누군가가 자식 같은 저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상상만 해도 가슴 한쪽이 저미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법원에서 표절을 인정받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천천히 그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두 개의 시를 보겠습니다.

자유


폴 엘뤼아르 (1895~1952)


초등학교 시절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페이지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조상(彫像)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밀림과 사막 위에
새 둥우리 위에 금작화 나무 위에
내 어린 시절 메아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밤의 경이로움 위에
일상의 흰 빵 위에
결합된 계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누더기가 된 하늘의 옷자락 위에
태양이 곰팡 슬은 연못 위에
달빛이 싱싱한 호수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리고 그늘진 방앗간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새벽의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 위에
미친 듯한 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구름의 거품 위에
폭풍의 땀방울 위에
굵고 무미한 빗방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모든 것 위에
여러 빛깔의 종들 위에
구체적인 진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깨어난 오솔길 위에
뻗어나간 큰 길 위에
넘치는 광장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불 켜진 램프 위에
불 꺼진 램프 위에
모여 앉은 나의 가족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둘로 쪼갠 과일 위에
거울과 내 방 위에
빈 조개껍질 내 침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게걸스럽고 귀여운 우리집 강아지 위에
그의 곤두선 양쪽 귀 위에
그의 뒤뚱거리는 발걸음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 문의 발판 위에
낯익은 물건 위에
축복받은 불의 흐름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화합한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건네는 모든 손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놀라운 소식이 담긴 창가에
긴장된 입술 위에
침묵을 넘어선 곳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안식처 위에
무너진 내 등댓불 위에
내 권태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욕망 없는 부재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되찾은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 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1941~2022)


신 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내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 오는 삶의 아픔
살아 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 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1982년

 
   여러분이 보시기에 어떤가요? 두 개의 시가 비슷한가요? 지금은 고인이 되신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은 2015년 6월 7일 트위터에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게 엘뤼아르의 표절인 걸 알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민주화의 대의가 중요했기 때문. 지금 생각하면 그게 잘한 일이었는지 묻게 된다.」는 글을 올렸고, 2015년 6월 24일자 경향신문 오피니언 ‘표절의 관하여’라는 글에서 비슷한 취지로 김지하 시인이 엘뤼아르의 시 ‘자유’를 표절했다고 주장하며 비판한 바 있습니다.
   황현산 선생은 「문학에서의 영향이라고 할 때, 사상의 기조, 세계관, 탐구의 방향 미적 감수성을 따른다는 뜻이지, 말이나 말의 형식을 그대로 옮겨 오는 것을 영향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표절이다.」라고 주장한 반면, 이시영 시인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1974)가 뽈 엘뤼아르의 ‘자유’의 표절이라는 황현산 선생의 지적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거기에서 ‘시적 착상’을 빈 것이지만 앞의 시는 ‘전혀 다른’ 시적 성취를 이룬 작품. 불문학자에게 결례지만 이게 예술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다음은 모 법원에서 있었던 손해배상 사건으로, 이 사건의 원고는 만화 시나리오(‘이 사건 제1시나리오’)를 작성하여 공모전에 출품한 작가, 피고1은 드라마 시나리오(‘이 사건 제2시나리오’)를 작성한 작가, 피고2는 피고1이 작성한 드라마 시나리오를 가지고 드라마를 제작 및 공급한 회사입니다. 원고는 피고들이 원고가 공모전에 출품한 이 사건 제1시나리오를 표절하여 이 사건 제2시나리오 쓴후 드라마를 제작했다고 주장하며 피고들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를 했습니다.
 
   법원 재판부는 제1, 2 시나리오들이 기본골격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기는 했습니다.
- 테러범이 부패한 권력자들에 의해 피해가 더 확대된 대형사고에 대한 복수를 시도하면서 극중 갈등상황인 테러범죄가 발생하는 점
- 테러범이 복수하는 과정에서 권력자들이 과거에 저지른 악행이 드러내려고 하자, 권력자들이 이를 은폐하기 위해 방송을 통한 여론 조작을 시도하고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협력과 배신을 반복하며 권력자의 자녀가 테러의 피해자로 등장하는 점
- 테러범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방법이 피리 부는 소리를 내는 것이고, 극 후반에 주요인물 중 한명이 테러범으로 밝혀지며, 테러범이 노트북을 이용한 해킹으로 교통수단을 납치하는 점
- 테러범에 대응하는 경찰들이 경찰 수뇌부와 사이에 내부적인 갈등을 겪으면서도 협력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
- 결말 부분에서 시민들이 테러범의 언행을 통해 사회문제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게 되는 점
 
   얼핏 보면 제1, 2시나리오들이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심리 끝에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 이 사건 제2시나리오가 제1시나리오를 표절한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과연 법원의 표절에 대한 판단 기준은 무엇일지 다음 시간에는 표절 판단 기준에 관한 법리를 살펴보면서, 위 사건에서 재판부는 어떠한 이유로 제2시나리오가 제1시나리오를 표절한 것이 아니라고 판결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법무법인 공화 구성원 변호사 김지환
전화: 02-537-3784
이메일: fron20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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